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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개념사전

죽음

海별쌤 2011. 2. 9. 14:18


<"죽음...만물의 피할 수 없는 종결">


요즘 기사 중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언젠가 '죽음'에 대해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쓰려다 보니 아직 시기상조...
단상만 적어놓고 다음 기회로 넘긴다.



기독교 신자인 후배와 점심 먹으러 가며,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이며, 무책임한 행동이란다.
그렇군. 그 말도 맞다.

호스피스 운동에 대해 찾아보라기에
예전에 대충 흝어보고 만 책 몇 권을 펴든다.

"어떻게 죽는가가 삶을 의미있게 완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 죽음을 아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죽음과 죽어감> 책 소개 중. 참고로 이 책은 '자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과학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죽음의 진실을 점점 더 두려워하고 부정한다.

왜 그럴까.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파멸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가중시킨다.
(예컨대 전쟁이 일어나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 엄청난 파괴력에서 벗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

기술진보와 과학발전으로 인해 인간은 새로운 기술로 대량학살무기를 개발하고,
이로 인한 죽음의 공포는 더욱 증가한다.

만약 과학과 기술이 파괴력으로 악용되지 않고
인간과 인간이 보다 깊이 교감하는데만 이용된다면,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 사람은 대개 분노한다.

'왜 하필 나인가?'
삶이 너무 갑작스레 유린당하는 기분에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다. 당연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직접 맞닥뜨려 경험하지 않는 한, 상상 그 이상일 거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의 경우는?
나이 든 사람은 언제 죽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들 생각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지만, 
대략 몇 살까지 살아야 살만큼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웹툰 작가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나오는 장면.

노인 부부를 보내는 상갓집에서
'이 정도면 호상이지'라는 누군가의 말에 주인공 할아버지가 벌럭 화를 낸다.


'사람이 죽었는데 뭐가 호상이냐'

(줄거리상 화를 내는 이유는 따로 있지만)
그 말도 맞다.

늙어 죽든, 젊어 죽든, 아이가 죽든
자연사든, 병사든, 타살이든 혹은 자살이든
뭐가 호상이고, 뭐가 호상이 아닐까

도대체 '좋은 죽음'이라는 게 있을까


 


 


2010년 봄, 언니가 예상치 못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한동안 그녀가 종종 혼자 울며 힘들어하는 것을 몰래 지켜보며...
막막했다.

절망감으로 우는 거 말곤 딱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평생 함께 할거라 믿었던,
누군가를 잃은 슬픔은 감당하기 벅차다.


남게 될 이는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을 잃는 거지만,
시한부 환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 모든 이들을 잃어야만 한다.

마음의 평화를 찾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좋게 생각하라'든지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다.
슬픔을 참기보다 슬픔을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분노와 우울의 단계를 지나면,
그때까지 해왔던 일들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관심사나 소중하게 느끼는 일,
아내 혹은 남편,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나눌 수 없게 된다는 절망감...

그럼에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거나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환자는 더 이상 우울해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의 단계가 행복한 상태로 이해되서는 안된다. 다만 감정의 공백기일 뿐.
'마침내 긴 여행을 끝내고 편안히 쉬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 뿐.
물론 누군가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싸우려고 하기 때문에 수용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므로 언제 마지막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평화롭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
 

'죽음이란 죽어감이 끝나는 순간'이라고 몽테뉴가 말했던가? ... 죽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에 따르는 절망감, 무력감, 소외감으로 인해 죽어감을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421-22쪽)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그 물음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 중요한 자각이다. ...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 ...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난다.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다. (법정, 23-24쪽)




죽음에 대해서 사색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삶을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일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성취한 지금의 삶, 즉 소중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삶이 가진 이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 43쪽)

'가장 좋은 죽음을 맞는 방법'이란 사실 '가장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삶은 자비심으로부터 나오며, 이러한 자비심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나'와 '현상'의 공함을 깨닫는 데서 나온다. (같은 책, 227쪽)




 

 

(작성 중)

 


참고도서:
에밀 뒤르켐, 『자살론』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죽음과 죽어감』('죽음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
법정 스님,『아름다운 마무리』('만약 삶에 죽음이 없다면 삶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달라이 라마,『달라이 라마, 죽음을 이야기하다』


  **읽고보니 위 책들은 내가 찾는 주제에 맞지 않다. 딱히 추천한다기보다 (관심 있다면) 참고하라는 의미에서 참고도서.


 


 요즘 기사들 중 눈에 밟히며,
 날 고민하게 하던 주제는 자살 혹은 사회적 타살.

스스로 생을 단축하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못 찾아, 혹은 '좋은 삶'의 언저리조차 갈 기회가 없어서 그런걸까.

그런 이들에게 좋은 삶이나 좋은 죽음에 대해 논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이 타고나는 천부적 권리나 자유는 거저 얻는 게 아니라면,
사회,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는 좋은 삶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 보장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줄지 않는다. 왜 그럴까.

좋은 삶을 꿈꾸기 힘들어하며, 

어떤 것도 선택할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이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
왜 그들은 평화롭고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를 가질 수 없는지. 

 


기사:
"학생 자살 중 26%, 원인도 모른다"
http://media.daum.net/society/view.html?cateid=1067&newsid=20110206110007933&p=moneytoday

MBC ‘PD수첩’ 황이병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
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cluster_list.html?newsid=20110209072015422&clusterid=281600&clusternewsid=20110209130622393&p=nocut

대전서 대학진학 실패 고3 수험생 투신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2/09/0200000000AKR20110209172100063.HTML?did=1179m

최고은 작가, 32세 어린 나이로 요절... 며칠 동안 제대로 못 먹었다.
http://www.vop.co.kr/view.php?cid=A0000036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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